sicu0780 2026. 2. 8. 14:52



아로스와 엘렌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입니다

아로스에게 엘렌은 도구로써, 병기로써 길러진 삭막한 삶을 양지로 이끌어준 태양이고,

엘렌에게 아로스는 종종 상념과 슬픔에 침잠될때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서로를 향하던 그빛이 영원할 수 있을까요.


엘렌에게 한번씩 찾아가 가이딩을 부탁했었지만
요근래들어 가이딩마저 피하는 엘렌을 보고 심란해진 아로스.
하지만 포기하지않고 오랜만에 다시 찾아가봅니다.
엘렌의 마음은 압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아로스
“선배님, 가이딩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엘렌
“너 능력 쓸일도 별로 없잖아.”

아로스
“이런저런 일로 한번씩...사용했습니다.
(약간 머뭇거리며 엘렌을 바라본다.) ….평소엔 되도록이면 쓰지말라는 말 기억하고있습니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힘드시겠지요.”


엘렌
“...이리오게.”
(착잡한 심정으로 가이딩 해줌..)

아로스의 상태는 크게 나쁘지않았고 당장 가이딩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다. 단순 가이딩을 받을 목적으로 들른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엘렌또한 그걸 알고도 받아주었으나 어김없이 이말까지 덧붙인다.

엘렌
“가이드 다시한번 알아봐줄테니 이번엔 너도 제대로 임하면 좋겠군.”

아로스
“… …”

간만의 접촉에 살짝 들떴던 그의 표정은 엘렌의 말에 다시 가라앉는다.
아로스가 답이 없자 엘렌은 그의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주며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춘다.

엘렌
“아로스.”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침묵 속에서 답이 돌아온다.

아로스
“….예, 알겠습니다.”

항상 엇갈리던 엘렌의 시선이 오랜만에 제게 닿았지만 시선을 피하듯이 내리깐다. 엘렌의 눈에 담겨있을 단호한 의사가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대답은 깍듯하지만 영혼없이 기계적이다.

엘렌은 잠시 아로스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둔다.
가이딩이 끝난 뒤의 정적은 언제나 그랬듯 짧았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무거웠다.
공기가 가라앉은 채, 서로의 숨소리만 남아 있었다.

엘렌
“…컨디션은 괜찮아졌나?”

아로스
“예.”

지나치게 간결한 대답이다.
엘렌은 그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안다.
몸의 상태만을 말하는 질문이었고, 그에 맞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예전엔 그 ‘예’ 뒤에 꼭 따라붙던 것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
조금 따뜻했어요.
선배님 덕분입니다.

이제는 없다.

가이딩 중에도 느꼈다. 아로스의 파동은 여전히 안정적이었지만, 그를 향해 열려 있던 부분이 닫혀 있었다. 마치 필요한 만큼만 허락하고, 그 이상은 스스로 잠궈버린 것처럼.

엘렌
“…무리하지 마라.”

아로스
“네.”

그 한 마디로 대화는 끝난다.
아로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한 발 물러선다.
문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멈칫하는 것을 엘렌은 놓치지 못한다.

아로스
“선배님.”

엘렌
“…왜.”

아로스는 잠시 말을 고른다.
숨을 들이켰다 내쉬는 사이에 수없이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로스
“몸 상하지 않게… 쉬십시오.”

엘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너무 또렷하게 알아차린다.
그건 고백도, 기대도 아닌 단지 예전에는 자신을 걱정해주던 사람이 이제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엘렌
“…그래.”

아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연다.
나가기 직전에 아주 잠깐 뒤를 돌아보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없이 문을 닫는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는 조용했지만 엘렌의 가슴속에서는 무언가가 분명히 떨어져 나갔다.

‘…이게 맞는 건가.’

그를 지키기 위해 만든 거리.
그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선택한 침묵.
그 모든 것이 아로스를 조금씩 어둠 쪽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 복도를 걷는 아로스는 손을 꽉 쥔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선배님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어 왔다.
하지만 빛은 멀어질수록 차갑다.
그 사실을 아로스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엘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쉰다.

“…후.”

방 안은 고요했다.
엘렌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앉는다.
가이딩을 마친 뒤라 몸은 미묘하게 무거웠고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마음이었다.

‘괜찮아졌나’

사실은 그 질문을 던질 때 알고 있었다.
아로스의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을.

“…기계처럼 굴더군.”

엘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깍듯한 대답, 내려간 시선, 더 묻지 않는 태도가 거리감을 체감시켰다. 예전의 아로스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 서툴고, 솔직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꼭 한 발 더 다가오던 아이였다.

허나 그걸 자신이 멈추게 했다.
엘렌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덮는다.
이마를 짚은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가이딩을 피한 건 사실이야.’

몸이 힘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아로스의 파동이, 이제는 너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죄책감이었고, 책임감이었다.
내가 참여한 실험, 내가 막지 못한 과거,
그 끝에서 태어난 아이.
그래서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으로서, 선배로서, 가이드로서
곁에 두고 길을 알려주어야한다고.
하지만..

“…언제부터였지.”

가이딩을 할 때 그의 숨이 가까워질수록 무엇보다 먼저 느껴지던 따스한 체온. 그가 이름을 부를 때
직함도, 거리도 없는 목소리.
그 모든 것에 자신의 마음이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된 순간부터, 이 위태로운 평화가 주는 안온함이 두려워졌다.
엘렌은 천천히 손을 내려 자신의 가슴 위에 얹는다.
아로스가 방을 나간 뒤에도 여전히 뛰고 있다.


“…이건 내가 가져선 안 되는 감정이다.”

그는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이 나직하게 말한다.
자신은 이미 한 번 파트너를 잃었다.
진심으로 사랑했고, 미래를 그렸지만,
끝내 사별했다.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 고통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이 남기는 상흔이 얼마나 깊은지 안다.
그 후의 삶이 얼마나 오래 무너지는지도.

‘혁명이 끝나기 전까지 내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없어. 그래서…’

“…널 밀어냈다.”

엘렌은 고개를 숙인다. 자책보다는 인정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아로스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다시 누군가를 잃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가이딩을 피한 것도, 시선을 오래 마주하지 않은 것도, 새 가이드를 찾으라고 말한 것도 모두 아로스의 미래에서 자신을 지우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녀석은 벌써 알아차렸겠지.”


하지만 그의 태도가 말해주고 있었다.
더 다가오지 않는 배려와 더 묻지 않는 침묵.
아로스는 자신이 만든 거리를 존중하고 있었다.
엘렌은 웃음 아닌 웃음을 흘린다.

“…너무 착해서 문제야.”

그리고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 고개를 든다.

그를 잃고 싶지 않다.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
그가 어둠으로 밀려나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사랑이란 게, 참 잔인하군.”

지키기 위해 밀어내고, 밀어내면서도 멀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감정. 엘렌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로스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밤만큼은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아로스.”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이름이 어둠 속에 낮게 스며든다.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엘렌은 깨달았다. 이미 그 아이는 자신의 삶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이 침묵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되리라는 것도.